천천히 바라보는 시간 오늘은 필름 카메라로 기록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느리게 찍고 천천히 기다리는 즐거움
디지털 시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필름 카메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선 도구일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즉시 확인할 수 없고, 설정도 수동이며, 심지어 36장을 다 찍고 나서야 현상소에 맡기고 결과를 며칠 뒤에나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느림과 기다림이 필름 카메라만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한 달 동안 필름 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하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천천히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쉽게 여러 장을 찍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삭제할 수 있다. 반면 필름 카메라는 매 장면이 소중하다. 한 롤에 정해진 컷 수만큼만 찍을 수 있기에 셔터를 누르기 전,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프레임을 어떻게 구성할지, 빛이 어느 정도 들어오는지, 이 순간이 정말 기록할 만한 것인지… 순간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오롯이 마주하게 만든다.
기다림도 일상의 흐름을 바꿨다. 필름을 다 찍은 뒤에는 바로 결과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결과에 대한 기대와 상상 속에서 나만의 기억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때 저녁노을이 참 예뻤는데 잘 나왔을까?’, ‘카페 창가의 그 조명은 너무 어두웠을까?’와 같은 소소한 상상이 나날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결국, 사진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지만, 필름은 기억 그 자체를 되새기게 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과정에서 나는 내 일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평범한 하루가 특별한 순간으로 바뀌었다.
실패와 우연이 만드는 나만의 색
필름 사진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ISO를 잘못 맞추거나, 노출을 과하게 줬거나, 렌즈에 먼지가 묻었거나… 디지털이라면 삭제 버튼을 눌렀을 장면들이 필름에서는 고스란히 남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실패’가 사진을 더 특별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 달 동안 찍은 필름 롤을 현상하고 스캔본을 받아보았을 때, 몇 컷은 너무 어두웠고, 몇 컷은 초점이 나갔다. 어떤 사진은 빛샘이 생겨서 붉은 얼룩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 모든 요소들이 오히려 사진을 더 ‘필름답게’ 만들어줬다. 완벽하게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흔적이 스며든 장면들.
가령 흐린 날씨에 친구들과 공원에서 찍은 사진 중 하나는 어딘가 색이 바래고,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나왔다. 처음엔 실패한 줄 알았지만, 그 사진을 다시 보니 그날의 촉촉한 공기와 잔잔한 분위기가 더 잘 느껴졌다. 필름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성은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필름마다 가지고 있는 색감이 다르다. 코닥 컬러플러스는 따뜻한 색감, 후지 슈퍼리아는 녹색과 파란색이 도드라지는 느낌.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을 찍어도 필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어떤 장면에는 따뜻한 코닥이 어울리고, 어떤 장면은 차분한 후지가 더 잘 맞는다. 이처럼 필름은 결과가 아닌 경험의 연장선이다. 예측하지 못한 우연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 그게 바로 필름 사진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한 달의 필름, 기억의 서랍을 여는 열쇠
한 달 동안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서 손에 쥐었을 때,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치는 기분이었다. 종이 위에 남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 순간의 공기와 감정, 냄새까지 떠올리게 했다. 디지털 앨범에 무한히 쌓여 있는 수천 장의 사진과는 다르게, 필름은 제한된 컷 수 덕분에 정말 기억하고 싶은 순간만 남아 있었다.
이런 ‘선택의 기록’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어떤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따뜻한 햇살과 고요한 창밖 풍경을 담았다. 또 어떤 날은 친구와의 웃음, 연인의 뒷모습, 혼자 마신 커피 한 잔이 남아 있었다. 그저 흘러가던 하루가 필름 속에 담겨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형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무엇보다 필름은 사진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 정성스럽게 현상하고, 직접 손으로 인화한 사진은 자연스럽게 앨범에 담기고, 시간이 지나면 꺼내 보며 회상할 수 있는 ‘물건’이 된다. 디지털이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에서, 필름은 아날로그의 정서를 통해 기억을 천천히 되새기게 한다.
이 한 달 동안 나는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보다,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나를 더 많이 마주하고, 나의 삶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필름 카메라가 단순한 기록의 도구를 넘어, 감정과 시간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 느낀 한 달이었다. 이제는 매달 한 롤씩, 나만의 시간을 기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