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장. 너무 작아서 무시할 수도 있고, 그 안에 온 하루가 담길 수도 있다. 오늘은 하루 한 장으로 드로잉 도전기를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하루 한 장, 마음을 그리는 연필
나는 어느 날 문득, 너무 많은 것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모, 사진, 감정, 심지어 습관까지도 전부 디지털 안에서만 존재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내 손으로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그려본 게 언제였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하루 한 장 드로잉 도전기’였다. 특별한 재료도 필요 없었다. 오래된 공책 한 권, 굴러다니던 샤프, 그리고 마음뿐.
그 첫날은 낯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펜을 들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하지만 잠시 창밖을 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래, 그냥 지금 보이는 걸 그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삐뚤빼뚤, 정확하진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내가 본 것’을 ‘내 손으로 남긴다’는 행위 그 자체였다.
그림은 내가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풍경, 사람들의 표정, 하늘의 색감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멈춰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매일의 드로잉 속에 담다 보니, ‘관찰’이라는 감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디지털 화면에선 절대 느낄 수 없던,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그에 따라 퍼지는 감각은 매일의 작은 치유였다.
내가 그린 그림은 나를 닮아간다
드로잉을 하며 가장 크게 느낀 건, 그림이 단순히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루 동안 어떤 감정 상태였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그림의 선, 밀도, 배치에 그대로 드러났다.
마음이 복잡한 날은 선이 조급하고 거칠었다. 여유로운 날은 선이 부드럽고 여백도 넉넉했다. 그림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었다.
특히 이 도전기를 시작하고 2주쯤 되었을 때, 나는 흥미로운 패턴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눈에 보이는 대상을 따라 그리기에 급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 속엔 내가 좋아하는 장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담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평소 좋아하던 카페의 의자나, 퇴근길에 본 노을, 집에서 자는 강아지의 모습 등...
그것들은 모두 내가 찍은 사진에도 있을 수 있지만, 손으로 그린 그림엔 ‘기억의 감정’이 더 짙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 자신에게 기대를 내려놓자 창작이 훨씬 편안해졌다. 그림이 예쁘지 않아도, 엉성해도 상관없었다.
그건 하루를 살아낸 ‘증거’였고,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기록은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느림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나를 만나다
디지털 디톡스를 말할 때, 흔히 ‘폰을 끄는 것’이나 ‘앱을 지우는 것’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중요한 건 단순히 무엇을 멀리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나를 다시 채우느냐이다.
하루 한 장의 드로잉은 나에게 그 답을 알려줬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고요하다. 유튜브도, SNS도, 음악도 틀지 않은 채 오롯이 펜의 움직임과 종이의 촉감에 집중하는 그 시간은 마치 명상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 하나하나에 마음이 머물고, 손끝의 선을 따라 호흡이 느려졌다. 그 몇 분, 혹은 몇십 분이 내 하루를 정리해주었고, 내 안의 소음을 줄여주었다.
디지털이 나에게 빠르고 많은 정보를 줬다면, 아날로그 드로잉은 느리고 적은 것에서 ‘깊이’를 가져다줬다.
지금도 여전히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 정물은 엉성하고, 인물은 닮지 않고, 원근감도 엉망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늘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나만의 방식으로 남긴다는 것.
그리고 그 기록들이 쌓였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가 흘려보낸 하루하루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하루 한 장 드로잉 도전기’는 단순한 그림 그리기를 넘어, 내 안의 감각을 깨우고 삶을 더 깊이 바라보는 훈련이었다. 만약 당신도 스마트폰 속에서 지친 마음을 느끼고 있다면, 연필 하나와 노트 한 권을 꺼내보길 추천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건 예술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천천히 다시 쓰는 방법이니까.